롯데택배 전국대리점협의회
“존경하는 재판장님. 원고 회사가 하청노동자들을 지배함에도 책임을 회피하는 이 사건은 대기업에 의한 원·하청 관계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거대자본의 노동착취와 원청의 책임회피 구조를 탈피할 기회로서 상징성이 있습니다. 피고들은 명백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상 근로자이고, 원고 회사는 노조법상 사용자입니다.”
예비법조인의 최후변론은 단호했다.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생 3명은 ‘택배노동자 파업’을 주제로 한 모의법정 경연대회에서 노동자들을 대리하면서 이같이 주장했다. 이들은 “원청이 미운털 박힌 노동자를 억압해 노조활동을 저해할 의도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CJ대한통운 손배소 ‘판박이’ 주제
시민단체 ‘손잡고(손배가압류를 잡자! 손에 손을 잡고)’는 지난 20일 서울 서초구 서울지방변호사회관에서 8회 노란봉투법 모의법정 경연대회를 열었다. 모의법정은 ‘손잡고’가 법학전문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2015년부터 매년 실시하는 국내 유일의 노동법 경연대회다. 지난 5월 접수가 시작돼 서면심사를 거쳐 이날 본대회가 진행됐다. 로스쿨 학생으로 구성된 20개 팀이 참가해 8개 팀이 본선에 올랐다.
올해 대회 주제는 현실이 그대로 반영됐다. 주최측은 ‘택배노동자의 파업에 따른 손해배상’을 문제로 출제했다. CJ대한통운의 손해배상 청구와 판박이다. 출제위원들이 문제를 공고한 지난 6월께 CJ대한통운은 올초 본사를 점거하고 농성했던 택배노조와 조합원 88명에게 20억원 규모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CJ대한통운측은 택배노조의 ‘불법점거’로 업무방해와 시설물 파손 등 100억원에 달하는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번 대회 역시 택배노동자의 쟁의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의 적법성이 다퉈졌다. 주최측은 이를 위해 가상으로 ‘한국택배’와 ‘택배노조 상남지부 갑산지회’를 등장시켰다. 문제에 따르면 한국택배는 대리점 소속 지회 간부 3명과 평조합원 A씨를 대상으로 쟁의행위에 따른 인건비 3천만원과 비재산적 손해 5억원이 발생했다며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이와 더불어 대체인력으로 투입된 직영기사를 폭행한 A씨에 대해서도 정신적 손해배상 1천만원을 요구했다.
주최측이 가정한 사건의 발단은 원청의 단체교섭 요구 거부로 시작됐다. 지회는 원청과 대리점의 단체교섭 불응이 부당노동행위라는 중앙노동위원회 판정에도 교섭이 진행되지 않자 지난 2월부터 분류작업과 배송을 거부했다. 그러자 한국택배는 직영 택배기사 위주로 대체인력을 투입했고, 지회 조합원들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터미널 출입구를 막았다. 화물차를 운전하던 직영기사가 이 과정에서 욕설을 퍼붓자 A씨가 상해를 입히는 상황도 가정했다.
‘대체인력 투입 저지’ 적법성 쟁점
법정에서는 △대체인력 투입 저지 행위의 적법성 △지회의 쟁의행위 정당성 △원청의 교섭의무 부담과 사용자성 △개인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의 정당성 등이 쟁점으로 공방이 오갔다. 팀별로 원고와 피고를 번갈아 대리하며 오전 10시부터 약 4시간 동안 변론했다.
모의법정은 실제 재판을 방불케 했다. 쟁의행위의 적법성과 원청의 사용자성을 두고 첨예하게 부딪쳤다. 택배사를 대리할 때는 택배노동자들의 사용자는 원청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택배기사들의 단체교섭에 응할 의무가 없고, 이에 따른 쟁의행위도 불법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적법한 대체근로 투입에도 폭력을 행사해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는 논리로 이어졌다.
반면 노동자측에서는 정반대 주장을 펼쳤다. 주된 근거로 ‘실질적 지배력설’을 채택한 2010년 ‘현대중공업 대법원 판결’ 등을 가져왔다. 택배사가 택배기사들의 노동조건에 실질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다는 논리가 주를 이뤘다.
대체인력 투입도 노조법(43조)을 위반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배송업무는 지역적 특성에 따라 수행되는데, 다른 지역의 직영기사를 대체 투입한 것은 ‘당해 사업과 관계없는 자’를 대체할 수 없도록 정한 노조법 조항에 정면으로 반한다는 것이다. 쟁의행위가 정당행위로 위법성이 없어진다는 결론으로 귀결됐다.
우승팀 “빠른 배송 이면에 노동자 희생”
치열한 법정 공방 끝에 국회의장상(최우수상)은 한양대 로스쿨팀(최진솔·이수진·송준영씨)에 돌아갔다. 심사위원장을 맡은 박은정 인제대 교수(법학)는 “전체적인 쟁점을 균형 있게 잘 다루고 원·피고 역할 모두 성실하게 해냈다”고 평가했다.
한양대 로스쿨팀은 이번 대회 참가가 두 번째다. 지난해 대회에 참가했지만 본선 문턱을 넘지 못하자 노동법을 공부한 뒤 재도전했다. 팀장을 맡은 최진솔(27)씨는 “빠른 배송 뒤에 수많은 노동자가 희생한다는 사실을 현실적으로 체감하는 계기가 됐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송준영(24)씨는 2018년 CJ대한통운 노동자 파업 당시 현장을 방문한 적이 있다. 송씨는 “당시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뒤 변호사를 준비하고 있다”며 “변호사가 된 뒤 법정에서도 같은 법리를 적용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수진(25)씨도 “로스쿨 입학 당시 사람을 사랑해서 법조인이 되고자 했다”며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전했다.
이들은 평소 노동법에 애정이 많았다고 한다. 송씨는 “2016년 구의역 스크린도어 김군 사망사고를 접하면서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말했다. 대학 입학 후에는 노동인권법 모임을 만들어 활동했다.
“외삼촌 노동운동 ‘유재관 열사’ 영향받아”
특히 최진솔씨는 노동법을 공부한 계기가 남달랐다. 노동운동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외삼촌 ‘유재관 열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유재관 열사는 1990년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인사연)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이듬해 6월 민주자유당 선거 승리 이후 인천대의 공권력 투입 소식에 인사연도 침탈될 것을 염려해 사무실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중상을 입어 운명했다. 외삼촌 얘기를 꺼내며 울먹인 최씨는 “외삼촌의 영향을 받아 어머니가 노동법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따셨다. 자연스럽게 어릴 때부터 노동법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며 “외삼촌의 희생 앞에 부족하지 않은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택배노동자들을 향한 시선은 따뜻했다. 송준영씨는 “법은 사람을 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아직 법이 특수형태근로종사자를 보호하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법이 사람을 향할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이수진씨는 “우리 사회가 효율성에 눈에 멀어 개인을 도구로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외롭고 무서운 곳에 혼자 있는 이들에게 응원을 보낸다”고 강조했다.
이번 경연대회에서는 국회의장상 1팀(상금 200만원)을 비롯해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상 1팀(100만원) △서울지방변호사회장상 2팀(각 60만원) △노란봉투법상 4팀(각 30만원)이 수상했다.